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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관계 없는 두 이야기.

1.
작품은 해당 아티스트의 성장을 멈추게 한다. 예술가가 어떤 작품을 낳았을 때, 사회속의 그 예술가는 거기서 멈춘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변화를 하고 있고, 어떤 성장으로 하고 있는가는, 결과물을 대중에게 공개한 순간 그 결과물로만 평가되고 알려진다.

결과물은 예술가의 지향점이자, 족쇄이다.
예술가가 떠안아야 할 짐은 자신이 낳은 자식이다.
짖눌려 죽어버리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완벽히 멍청하다.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2.
나는, 음악가는 좋은 음악을 만들면 그걸로 만사 오케이 라는 말을 정말 싫어한다.


어떠한 창조행위를 할 때에는,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성장이 멈추게 된다. 창조의 도중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 일관성은 예술품이 반드시 가져야 할 미덕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 예술품이 [변화]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변화를 담겠다는 목표는 일관성있게 나타나야 한다.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단단하게 굳혀야 한다.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의 문제를. 가는 길은 변할 수 있어도, 길의 끝이 변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삶과 현재의 삶을 그대로 녹여서 굳혀, 자신만의 도그마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수이다. 이 도그마를 통하지 않은 채 만들어지는 창작물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조악한 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도그마는 소모되어 없어진다. 그것도 생각보다 빨리. 아마도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웃기지도 않는 증후군은 이에 근거할 것이다. 그 후에는 매너리즘이라는 이름의 지옥이 찾아온다.

실력의 발전은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도그마의 변화는 다르다.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일은 곧 자기 파괴를 동반하고, 엄청난 고통이 뒤따른다. 그리고 나서의 재창조. 이 일련의 행위를 두려워하지 않아야만이 비로소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슬픈 사실은, 이 성전(聖典)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살고, 파해치고, 자신을 깨부수어 없애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고통의 산물이다. 고통을 다음 창조의 과정으로서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그 사람의 그릇과 됨됨이에 따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창조자는, 한 명의 위대한 인간이다. 끝남을 두려워 하지 않는 창조자는 매번 찾아오는 고통을 [견디어]낸다거나 [극복]한다거나 하지 않고,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들인다.



나는, 음악가는 좋은 음악을 만들면 그걸로 만사 오케이 라고 말하는 인간이 참 안쓰럽다.

그는 아마 테크닉을 도구화해서 사용하는 인간일 것이다.

그는 결국 자신이 낳은 자식에게 살해당할 것이다.

아니면 아무것도 낳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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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9 22:29 2007/03/09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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