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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돌파 그렌라간 리뷰 - 시대가 원한 로봇물

※ 본 포스트는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에 대한 스포일러를 하나가득 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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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애니메이션을 꼽으라면, 4분기 신작중에 아직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는 현재로서는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럭키스타(둘 다 2007년 2분기-3분기에 걸쳐 2쿨 방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좋은 TV애니메이션으로서 많은 인기를 얻었고, 인기와는 관계없이 많은 것을 남겼다. 나중에 럭키스타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좋겠지만 이 포스트에서는 그 중 그렌라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렌라간은 어떤 애니메이션이었을까.
 

1. 아동용 애니메이션


  그렌라간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이었다. 우선 방영시간이 일요일 오전 8:30이라는 점. 90년대를 십대로 지낸 사람들은 알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시간대는 디즈니 만화동산의 방영시간이었다. 마치 어린이 여러분이 주말에 늦잠자는 것을 막기라도 하듯이 아동 대상의 애니메이션은 이 시간에 많이 편성이 되는데, 동시간대에 게게게의 키타로같은 작품들이 방영되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용상으로도 그렌라간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단순하고 메이져한 디자인의 메카닉들, 사랑과 우정, 열혈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주제, 극도로 심플한 플롯과 단순한 대사. 게다가 액션신의 연출과 작화는 정말 굉장하다. 생각없이 신나게 보기 딱 좋은 애니메이션인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요소들을 보면 그렌라간은 아동용 애니메이션임에 틀림이 없어보이지만, 분명 그렌라간의 팬들은 이 사실에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렇다. 그렌라간은 사실 아동용 애니메이션이 아닐 수도 있다.


2. 오타쿠 애니메이션


 그렌라간은 지금 현재 동인활동의 대상으로서 가장 활발하게 소급이 이루어지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종영된지 얼마되지 않은 최신작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동시기에 방영된 타 작품들에 의해 동인활동이 두드러지게 활발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BL물의 경우 애니메이션의 방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현재 그렌라간의 동인지들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BL물이다.

 그렌라간의 어떤 점이 이런 현상을 불러온 것일까.

 그렌라간의 스토리라인은 극도로 빈약하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렌라간은 카미나가 죽은 시점에서 이미 스토리라고 부를 만한 것은 끝나 있었다. 그 뒤로는 시몬이 카미나의 죽음을 극복하는 약간의 에피소드를 빼면 그야말로 아무런 반전도 발견도 없는, 즉, 플롯이 없는 서사의 흐름일 뿐이다. 물론 표면적으로야 안티스파이럴이니 뭐니 여러가지 반전이 많이 있지만, 그런 플롯 요소들이 가지는 힘은 대단히 미약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이 애니메이션이 표면상 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혹은 죽어도 주인공의 목적 달성에는 아무런 타격도 없다는 - 그렇고, 둘째로 그렌라간의 날아다니는 설정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렌라간은 이렇다 할 설정이라는 게 없다. 그냥 얼추 모양이 맞을 것 같아서 끼워보면 합체되고, 밀리는것같아서 기합넣으면 몸의 몇 배 큰 드릴이 떡하니 나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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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법칙을 완전히 무시한 그렌라간의 설정은 이 애니메이션의 방향성을 이야기해준다.


나중에 가면 합체랍시고 작은 로봇이 더 큰 로봇 속에 들어가서 조종하는 추태(...)를 보여준다.
즉, 앞으로 그렌라간이라는 로봇이 어떤 짓을 할지 시청자들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어차피 지금 곧 죽을 것 같아도 더 큰 드릴로 뚫어버리겠지'하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유일하게 성립하지 않는 것이 카미나의 죽음이고, 따라서 그렌라간의 플롯은 카미나의 죽음 하나에 모두 집약되어, 거기서 끝나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그렌라간은 하나의 이야기로써의 매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도식적이고 진부한 장치로 도배된 클리셰 덩어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렌라간의 스토리를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나가는 것은 뭘까.
 바로 캐릭터이다. 그렌라간의 주역 캐릭터들은 대단히 세심하게 만들어졌고, 또한 매력적이다. 기존의 모에요소들을 집결하고 잘 섞어,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은 스토리에 비해 캐릭터에는 상당한 정성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일견 단순해보이는 열혈바보지만 사실 어울리지 않는 복잡한 고민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캐릭터간의 감정 호응도 잘 짜여져 있다. 그렇다는 말은, 이 애니메이션이 27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남기고 싶었던 것은 나선족과 안티 스파이럴의 존망을 건 사투가 아니라, 시몬, 카미나, 비랄, 로시우, 요코, 기타등등기타등등이라는 것이다. 즉, 캐릭터가 중요한 것이고, 캐릭터들이 살아서 자신들의 매력을 발산할 무대를 제공받을 수 있는 간단한스토리만 있으면 그 외의 것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렌라간은 가이낙스가 캐릭터를 팔기 위한 애니메이션이고, 동시에 명백하게 동인 작가들을 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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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야 워낙 '노리는' 애니메이션들이 많기도 하지만, 위의 세 장의 사진을 늘어놓고 보면 이것은 이렇게 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시몬X비랄, 시몬X로시우, 시몬X부타 중 어떤 커플을 지지하는가. 이것은 하나의 국부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른바 동인녀들이 동인활동을 전개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오타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모에의 데이터베이스로만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볼 것이며, 이 인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은 그렌라간이 제작될때 분명 고려된 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부타의 경우, 전혀 의사표현을 못하다가 딱 한개 에피소드에서만 인간화되어서 아이러브시몬사마를 열정적으로 외치다가 퇴장하는 것은 명백하게 커플링을 위한 재료를 던져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럭키스타나 하야테처럼 방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한 애니메이션을 일반적으로 오타쿠 대상 작품이라고 보지만, 그렌라간은 다른 의미로 철저하게 오타쿠를 노리고 있다. 오타쿠에게 있어서 필요한 장난감, 즉 모에한 캐릭터를 제외한 다른부분은 축소시킴으로서, 이것은 30분짜리 27개의 캐릭터 영상 설정자료집처럼 만들어졌다. BL얘기만 너무 많이 한 것 같은데, 그렌라간에는 BL적인 요소 이외에도 전통적인 열혈로봇물의 단골 요소나, 흔히 모에요소라고 인식되지 못한 채 소비되고 있는 여러가지 장치들이 많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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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캐릭터이지만 카미나의 죽음 이후 스토리에서 완전히 붕 떠버렸다.


 그렇다면 그렌라간은 완벽한 오타쿠 애니메이션인가? 그렇지도 않다. 애니메이션의 성향적 특화는 가이낙스가 생각할 법한 발상이고, 오타쿠들의 집단인 만큼 그렌라간은 충분히 오타쿠들에게 쓰여질만한 요소요소를 경제적으로 집약시킨 애니메이션이어야 했을테지만, 캐릭터 외적인 요소가 너무 축소된 만큼 그 부작용도 나타나는데, 요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요코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캐릭터이지만, 시몬에게 니아가 생기고 카미나가 죽으면서 완전히 스토리에서 붕 떠버린다. 키탄과의 막간 로맨스가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요코의 실낱같은 존재의의를 부여해주기 위해 억지로 추가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실제로 아무런 복선도 없이 덜컥 키스해버린다..). 덩달아 캐릭터간의 커뮤니케이션도 특별한 것이 없어지니 요코라는 캐릭터의 방향성이나 특징도 옅어지고. 니아가 인기가 없다는 사실은 이 애니메이션이 동인녀들에게 사랑받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요코가 인기가 없다는 사실은 위와같은 이유에서 발생한 미스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등장하는 캐릭터는 많은데 주역들 이외에는 거의 아무런 개성도 부여되지 않은 채 2쿨이나 되는 긴 스토리를 진행시키다보니 지지부진하고, 작품 자체로써의 매력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안고 있다.


3. 가이낙스가 깔아준 멍석, 그리고 라크스 클라인과 니아


 그렌라간은 플룻 위에 이야기가 흐르는 애니메이션이 아니고, 몇 개의 캐릭터와 몇 개의 요소들이 뭉쳐져서 굴러가는 독특한 작품이다. 결과적으로 대 오타쿠용 결전병기 비슷한 작품이 만들어졌고, 가이낙스가 새로 깔아준 멍석에 오타쿠들은 올라가서 뛰노는 것만 하면 즐거울 수 있게끔 되어 있다. 하지만 오타쿠 이외의 시청자들을 끌 만한 매력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적다는 점은 - 그것이 의도적이건 아니건 - 분명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공적인 오타쿠 애니메이션인 건담 시드가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높은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일단 '건담'이라는 점과, 4쿨짜리 골든타임 메이저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렌라간또한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라크스 클라인은 인기가 있다는 데 반해 니아는 인기가 없다는 점이 많이 아쉬웠다. 동인 활동이 활발한 건담 시드에서, 라크스 클라인이 인기가 있다는 것은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인기가 많다는 것을 말한다. 건담시드는 이야기 다운 플롯과 서사, 모에 캐릭터를 모두 갖춘 좋은 일본식 TV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그렌라간은 심플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매니악한 애니메이션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가이낙스는 이것을 의도하고 만든 것일까.
 대중적인 인기는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렌라간은 분명 가이낙스의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 산업의 소비자층에서 오타쿠가 차지하는 비중은 늘어만 가고 있고, 새로운 소비 패턴으로서의 2차 창작의 중요성이 계속 높아져 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그렌라간과 같은 작품의 등장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가이낙스가 그렌라간으로써 새로운 오타쿠 애니메이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하면 과장일까. 하지만 내가 본 그렌라간은 그만큼 신선했고, 어떤 의미로는 충격적인 좋은 애니메이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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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31 17:37 2007/10/3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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