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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인사이드 (Mar Adentro / The Sea Inside,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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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트에는 영화 씨 인사이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은, 스포일러가 중요한 영화는 아닙니다.



1. 사람들이 [자살이 나쁘다]고 말하는 근거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자살은 삶에 대한 포기를 뜻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의 가장 파괴적이고 비 생산적인 결과가 바로 자살이다. 이러한 자살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어떠한 창조도 깃들어 있지 않다(죽음에 창조가 있다고 하면 비웃겠는가? 그렇다면 스스로를 먼저 비웃어라).
이성이라는 축복이 저주가 되어 스스로를 옥죄어 오고, 사고는 전진을 거부한다.

 반면, 어떤 사람도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죽음에 대해 아무리 생각한다 한들 이미 죽은 사람보다는 죽음에 대해 더 알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죽음을 판단하는 방법은 지극히 방어적이고 주관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사라진다. 멸망. 끝. 두려움. 상실. 슬픔. 고통. 그래서 막연히, 불안하게 이렇게 말한다. [죽어버리는 것은 좋지 않아.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아. 살다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 라는 자기최면을 입에 주워삼긴다. 자살하려는 자는, 자살하려는 자 끼리도 이해받지 못한다.


2. 씨 인사이드는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안락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리고 라몬은 결국 안락사를 택하지만, 안락사를 옹호하는 영화가 아니다. 안락사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내놓고 있지 않다. 이 영화에서 짚어내어야 할 것은, 안락사를 두고 오가는 사건 속에서 얽히는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라몬이 받는 사랑은 정말 다양하다. 영화는 [100명이 가지는 100가지의 사랑]을 훌륭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그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라몬을 사랑하고, 라몬 또한 그 스스로의 방법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것들의 모습은 우리 범인들의 사랑이 그러하듯, 어느정도 일그러져 있고, 이기적이다. 서로를 보듬어야 할 사랑이 상처입히는 칼날이 되고, 사랑에 눈물을 쏟아낸다. 라몬의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방법 또한 알 리가 없다. 라몬이 표출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시시껄렁한 설교(당연하게도 오해에 기반한)를 늘어놓으려 하기도 하고, 그저 동조하기도 한다. 그는 삶을 포기한다고 비난받고, 주변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며 또 비난받는다. 자신의 틀에 세상을 끼워맞추려는 사람들의 조악한 폭력.
 아이러니하게도 라몬은 정말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는 [생명력]이 충만한 타입의 사람이다. 안락사, 자신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괴로워하고, 고개를 돌리고 싶어하면서도, 그는 결국 바다를 사랑하고, 그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다. 죽음이 무엇인지는 보통사람들처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훌리오의 상실, 그녀와 같이 살아갈 수 없다는 슬픔. 이 장면에서 그는 자신이 죽음을 원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는 웃는 얼굴로 [삶은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고 말할 수 있고, 또 다시 웃으면서 죽음을 주장한다. 그와의 이별에서 사람들은 우는 것이 아니라 웃어야 마땅하다. 마치 처음에는 가장 이기적으로 라몬에게 다가갔던 로사가, 마지막에는 라몬에게 웃어주는 것처럼. 그가 정말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 숙고하여 내린 결론을, 그를 사랑하는 만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나는 단수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삶은 권리 라는 말을 그저 뜻도 모르면서 주워삼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나온 말인지 아는 것. 이 영화는, 마치 바다처럼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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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5 09:28 2007/04/0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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