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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영화 그랜토리노에 대한 미리니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들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그랬다. 나로 하여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얼마나 거북한 얼굴과 표정의 소유자인지 잠시 잊게 해주었다. 이미 내가 스쳐보듯이 훑었던 몇 개의 영화평에서(씨네21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기획기사를 보고 그대로 베껴쓴 것이 확실한 듯한 대학내일의 영화평을 포함해) 사람들은 석양의 무법자 시절의 클린트가 그대로 돌아온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 20대에서 80대처럼 우뚝 서 여간해서 잘 움직이지도 않던 목석같은 그 남자는, 영화 그랜 토리노에서 바로 우리가 그를 느꼈던 그 자리에 돌아와 서 있었다. 배타적인 눈빛과 마초스러운 가슴팍을 그대로 가지고.

 그는 무척이나 마초스러운 남자이다. 그의 영화 또한,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마초성, 그가 표현해내는 남자들은 무언가 다른 구석이 있다. 영웅은 그가 자주 맡아온 배역이고, 자주 이야기하던 인물상이었다. 찌부려진 미간만큼이나 범접하기 어려운 영웅상을 그는 줄기차게 연기해왔고, 그가 연기하는 인물들은 본인의 좁은 연기폭에 힘입어 '클린트 이스트우드 적 마초'라는 독자의 인물상의 그늘 아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랜토리노는 클린트 이스트우적 인간상의 연장선 위에 있는 영화이다. 젊은 시절 고독하고 시크했던 영웅은 소통을 거부하는 80 노인이 되어서 늙은 개와 함께 맥주캔을 연신 들이키고 있다. 그는 또한 상당히 방어적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아들들과 좀 더 잘 지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으면서도 잘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따라서 초반부터 신부가 줄기차게 권유하는 고해성사라는 것은, 월트라는 앞뒤 꽉막힌 노인의 문을 열어 흉금에 쌓인 말을 털어놓게 하여 진실을 마주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동시에, 월트는 신부에게는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하긴 하지만, 그의 진짜 속내는 두 번째 고해성사, 바로 지하실에 갇힌 타오와 철장을 사이에 두고 타오에게 짖씹듯이 내뱉는 전쟁에 대한 회고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하지도 못하던 늙은 노인은, 이 고해성사 후에 극의 이야기를 단숨에 빨아들여 진행시키는 행동에 돌입하게 된다. 영화는 타오라는 한 소년의 성장을 보는 재미도 있고, 그 부분에 실린 무게도 있지만, 역시 그보다 더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월트 코왈스키라는 인간의 변화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올바른 방법을 찾아 실행하는 당위적 희생.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그가 직접 만들고 보살핀 분신과도 같은 그랜토리노는 자신이 직접 키운 동양의 아들에게 대물림되어 그를 또 다른 월트로 만들어주겠지. 아아, 신이시여. 이 남자는 대체 얼마나 멋진 마초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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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10:24 2009/03/1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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