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조직이라는 것은 군대처럼 속 편하게 좃대 세우고 앞만 보고 달리면 장땡인 그런 물건이 아니다.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곳은 명확하지 않다. 욕구는 개별적이고, 보편적인 동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와 군대는 그 근본부터 다르다. 권력자들의 권력은 국민들로부터 주어진다. 권위는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에서는 뭐든지 아래에서 위로 전파되어야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하기를 선호하지만, 실질적으로 인간사회에서는 위도 아래도 없다. 구성원들도 그렇게 말하고 인식하고 있어야 정상이다. 편의를 위해 일반 시민을 아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법칙 아래 경제적, 정치적 힘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을 위라고 명명해보자. 앞서 말했듯, 모든 사회적인 힘은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 민주주의 사회의 지도자들은 피곤하다. 사람들이 하나하나 요구하는 것에 전부 귀 기울여야 한다. 작은 집단이라도 이끌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쩌면 그렇게 열이면 열 다 생각들이 다르고 하고싶은 게 많은지 여간 짜증나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를 이끌어야 할 지도자라면 어떻겠는가. 국민들로부터 받은 신뢰의 대가로 격무로 인한 수명단축을 보장받는 최악의 3D직종, 이론적으로는 대통령이다.
제국시절, 일본의 관료주의는 군국주의에서 태어난 가장 못난 형태의 필연적 돌연변이였다. 그리고 20세기 일본에서 태어났던 것들은 의례 그렇듯,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뿌리박혔다. 우리나라는 뭐든지 위에서 아래로 흘러넘치길 기다린다. 사람들은 제 발로 제 갈길을 가기보다는 위에 누군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휩쓸려가길 원한다. 그것이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사회의 양적 발전을 이끌어낸 영웅이라는 점은 부정하지 못하고,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 사실을 호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논리, 큰 양동이에 물을 부어 넘치게 해 주변의 작은 양동이를 채우는 위에서 아래로의 논리가 과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실용적’인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박진영의 신격화, 디워의 지랄(미안, 다른 고운 말 찾아보려고 했는데 나의 빈약한 어휘는 이 품격낮은 표현 이외의 다른 단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NDS발언. 이것은 이 사회가 아직도 위에서 아래로의 발전을 정답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현상들일 것이다. 왜 제 2의 박지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유소년 축구에 투자하고, K리그 경기를 봐 줘야된다는 사실에는 다들 동의하면서, 원더걸스는 들으면서 URD는 외면하면 제 2의 박진영은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은 모르는 걸까. 수백억으로 금칠한 디워는 시장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자랑스러운 한국판 할리우드 영화니까 밀어주는 거고, 한국도 그만큼의 기술이 되니까 NDS 하나쯤 만들 수도 있는거고. 그런데 디워는 개발살났고, 우리나라는 NDS 못만든다고 비웃기 바쁘다. 왜들이래 이거. 다른나라는 다 하는데 왜 우리나라는 안된다는 거야.
인간 사는 사회니까 안되는겁니다. 사람 손으로 아래부터 위로 올려야지, 돈으로 위에서 아래로 뿌려대니까 될 일도 안되는겁니다. 돈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의식은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원래 문화라는 건 돈도 중요하지만 의식의 흐름 없이는 어디로든 흘러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난 참 마무리가 잘 안된다.